<삶의 발명>
- 정혜윤-
2.[ 앎의 발명]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은 기습적이었다.
전쟁개시후 반년정도는 일본이 우위를 점했다ㆍ
그 결과 아시아 각지에서 약30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1942년 5월23일 일본은 총독부 어용신문인 [매일신보]에 광고를 냈다.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온지 2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조선인 남방포로감시원 모집을 한다는 것은 조선인에겐 참을 수 없는 감격이다. 이로써 조선 청년은 미국과 영국의 포로위에 군림하고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되었다.'
근무기간은 2년 월급은 50엔 전쟁포로 감시를 위한 특수부대 노구치부대의 시작이었다
당시 50엔은 큰돈이었다
더구나 포로감시원은 전쟁터에 나가서 총을 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한다면 군인보다 차라리 포로 감시원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많은 조선 청년들이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이런 판단을 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 각지에서 3400명의 노구치 부대원들이 모집 되었다
부대원들이 훈련장소인 부산에 모여들기 직전6월 미드웨이해전의 패배는 비밀에 부쳐졌다.
1942년여름은 전에 없던 극심한 가뭄으로
땀에 찌든 채 두 달 훈련을 받는 동안 조선청넌들은 몸으로 익혔다
바로 뺨때리기였다
일단 뺨부터 때리고 보는 것, 이것이 포로를 대하는 첫번째 방법이었다
포로에 대한 인도적대우를 명시한 제네바협약이란것에 대해서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1942년 8월 노구치 부대원들은 배를 타고 남방으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인 포로 감시원중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발가벗져지고 머리를 밀린채로 연합군(미국ㆍ영국ㆍ호주ㆍ네덜란드 등7개국)에 의해
전범재판을 받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연합군포로들의 기억이 조선인감시원들의 생사를 갈랐다.
강제 노역, 뺨 때리기는 거의 모든 포로학대의 유력한
증거였다.
조선인 전범 149명중 23명은 조국을 해방시킨 연합국에 의해 사형당했다.
조선인 포로감시단원이 사형을 당하는 동안 천황,731부대 책임자,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기획자,전쟁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기업인 누구도 전범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조선인인 감시원청년들의 분하고 아픈 죽음에 터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잊혀지지않을 권리 "라는 제목의 6.25전후의 특별전을 보았다
남방포로 감시원의 이야기를 알게되니,
6.25포로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인 전범 재판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야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당시 역사가 필요로 했던 역사의 엑스트라에 불과 했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만의 역사를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삶의 가장 비밀스런 부분을 건드리 것이다
여태까지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나의 삶이 아니였다는 "앎."
식사는 식사이상, 노래는 노래 이상, 삶은 자고 먹고 노래하는 그 이상의 것,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그 이상의 것, 죽을 때 돌아보고 후회할
우리의것 소중한 것이라는 "앎"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