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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by 날랜두꺼비 2024. 6. 11.

                                                      최은영
  
대한민국에서 공부하고 글을 쓰는 여자로 사는 일에 대한 소설입니다.


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3시30분에 열렸다.
짧은 커트머리에 갈색뿔테 안경을 쓴 그녀의 얼굴은 강사 파일에 적힌 나이보다 대 여섯살은 어려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한  편이었다.
영문과  전공수업은 전부 영강수업이어서 그녀는 영어로 수업소개를 하고 있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영어로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과제로 내준 에세이들이 좋았고  혼자읽을 때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이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때 머리속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은행에 근무 하다  대학에 들어왔다
젊은 여자강사라 아이들이 무례했다는 부분, 선생님이 정교수 였다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녀가 더 자주 생각났던 건 강의를시작하고서부터였다.

10년전 어느날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여자강사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무례를 이야기 했다.
마치 내게는 그런 일이  아주 멀고 무관하기만 할 것 처럼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찿아 볼 수 없었다
10년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 붙게 했다



옛 선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잊혀짐에 대한 것을 받아 들이는 것도 필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자기의 인생에 공부와 글쓰기 외에, 하고싶은 다른 일도  있다.
자기가 우선순으로 순서를  정하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삶도 멋진 인생이다
나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앞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발을 디딜  곳이,
거기가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런 존재로 세상을 살아내고 싶기도 하다.